견성체험기초견성(동행 진 프로그램) 체험기 by. 라일락님(50대)




동행 진 수업은 초견성을 목표로 하는 수업이다. 나에게 있어서 견성이라는 것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잡힐 듯 잡을 수 없는 신기루,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경전을 읽고, 여러 곳을 다니며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순전히 나의 무능함 때문일 것이다.

경전들에도 나와 있듯이 탐진치 삼독이 눈을 가려서 일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렇게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내가 견성을 할 수 없이 바보이거나, 아니면 견성이라는 깨달음이 너무 높아서 도달하기 힘들고 극소수의 타고 난 사람만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이전의 나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나에게 견성은 모호성이라는 측면과 절대성이라는 측면이 있다. 이것은 그간의 배움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다. 나에게 견성이 모호하게 느껴졌던 것은 견성을 가르치는 표현들이 모호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보면 찾지 않는 찾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찾지 않으면 안 찾으면 되지 찾지 않는 찾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견성에 대한 설명은 이처럼 모호하다. 이 모호성은 모든 문파와 종파를 떠나서 동일했다. 모든 수업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일했다.

 

하지 않는 함, 생각을 멈추고 생각하기, 생각이 끊어진 자리, 마음을 비워서 그 비움마저 놓아 진 자리, 원래부터 있었기에 따로 인위적인 노력이 없이 알아져야 하는 것 등 수없이 많은 말과 가르침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견성이라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기에 인위적인 어떤 노력도 해서는 안되고, 인위적인 어떤 노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가짜라는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싸해 보이고, 심지어는 감동도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감동은 진짜 감동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으른 마음에서 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대도를 통하고, 시대에 이름을 떨치고 가신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스님이 되는 것도 인위적인 일 중에 가장 큰 일이며, 산속으로 가고, 절에 들어가 사는 것도 인위적인 일이다. 계를 지키며 청정하게 산다는 것도 인위적인 노력이다. 짐승처럼 욕구가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사는 것이 인위적인 것을 동원하지 않는 삶이다. 인위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 답이라면 성인들은 왜 경전을 남겼을까! 그냥, 자신만 이루고 떠나면 되는 것인데, 굳이 알려 주어서 남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또, 깨달음을 그냥 자기 경험을 이야기 해주면 될 것인데, 굳이 수많은 경전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그에 맞추어 설명해주는 것 또한, 대단히 인위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경전적 근거에 맞춤으로 해서 자기 안도감은 생길 것이다. 그러나, 대도무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한 길만 있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 논리의 모순이었다.

 

성령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늘 노래하지만, 정작 기도 내용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잘살려고 하는 것이다. 죽어서 천국 가고 싶고, 살아서 부귀와 공명을 얻고 싶어서 늘 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찬송가 부를 때는 부귀공명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한다.

순수한 성령 체험보다는 자기 인생의 해결사로서 자신이 부려 먹을 절대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는 함께 하나님을 이용해 먹자고 모의한다. 그것을 전도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할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남의 허물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자신이 깨끗하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힘이 없으니 힘 있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부귀와 명예, 천국을 얻자는 것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며, 늘 감사하다는 사람은 극히 본 적이 없다.

남에게 전도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 천국 못 갈까 봐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물론, 내가 만난 사람이 전체의 교인들은 아닐 것이다. 단지, 수십 년간 전국 각지를 돌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느끼던 좌절 중 하나인 모호성이다.

어쩌다 친절한 책을 만나게 되면, 아주 짧게 자신의 견성 경험을 설명해 놓고 있었다.

 

두 번째는 절대성이다. 견성이 모든 깊이 있는 수행의 시작이라고 한다. 어느 곳에서는 견성오도 하면 즉심 시불이라고 해서, 견성하면 마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는 견성이 제대로 된 공부의 시작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견성을 하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절대성이다. 견성을 통하지 않고는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은 나의 지난 30년간의 노력이 헛것이라는 것을 여실이 들어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여정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 있는 분들은 친절한 안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견성했다 하는 경험 자체도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제자가 견성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견성했으니, 너는 알아서 공부해서 와!’

‘견성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선근이 있어야돼!’

이 말은 자신이 선근이 높아서 견성을 한 것이지 너 같은 사람은 안돼하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분은 아실는지 모르겠다.

또한, 자조적인 사람도 있다. 자신이 가는 길의 발자취를 남기면 그 향기를 보고 후대의 사람이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비인 부전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이 덜 된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덜되고 잘 되고는 순전히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이말은 앞으로 나에게 잘보여 라는 말로 들린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문이다. 아니면 대놓고 그말을 하기 어려워서 돌려 말하고 있는데 어리석어서 못알아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외국에서 유명세가 있던 사람들이 조금은 더 친절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영어나, 자국어로 강의 되는 강의를 듣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짧은 시간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언어의 수준이 아니었다. 질문도 영어로 해야 하고, 청강도 영어로 해야 한다. 이때 사용된 영어는 내가 일상의 공부로 얻기 어려운 수준의 전문용어가 있는 언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강의 내내 그분들의 삶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분위기를 살피는 것일 뿐,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서 제대로 된 명상 센터를 찾던 중에 이곳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맑고 밝은 분위가 좋아서 끌렸다. 그러나, 막상 강의를 들어보니, 그간의 내 생각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질 높은 수업이었다.

단순히 마음을 잡고, 일상에 일어나는 괴로움이나 덜어내 볼까! 하는 차원에서, 나이 들어 게을러지는 것 같은 자신을 채근하기 위해서 수강을 했었다.

그런데, 첫 수업부터 놀라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간의 나의 공부에서 정리되지 않는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서 강의 되고 있었다.

 

한 번의 강의가 숱제 여러 권의 책이 썸머리 되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마치, 그간의 마음공부를 고등하고 시절 학력고사를 공부하는 수준으로 노트 정리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강의 속에는 그간 내가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핵심들이 있었다.

이런 것을 보고, 오프라 윈프리는 그의 저서 위즈덤에서 ‘아하~’하는 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들을 때마다. 그 속에 사이다가 있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수많은 책들과 그간의 공부 내용들이 질서 정연하게 책꽃이에 책이 잘 정리되어 꽂히듯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는 뭔가 배울 것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전에 찾지 못한 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견성 코스인 동행진의 수업을 수강하게 된 것이다.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젊은 분들인데, 요즘 사람 같지 않고 친절했다. 그래서, 이분들의 스승님은 어떤 분이기에 거친 요즘 사람들을 이렇게 잘 다듬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인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사람 밑에 있는 직원들과 지도자들이 어둡고, 거칠고, 이기적인 것에 비해서 이분들은 너무나 맑고, 밝았다. 또한, 친절했다.

그간 숱한 단체를 전전하며 공부할 때 느낄 수 없는 자유와 평안, 그리고, 마치 고향에 도달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나는 이런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울림의 정체를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나는 여러 강의와 교육을 들으면서 하나의 방어 기전이 생겼다. 그것은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듣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강의는 내가 옳은 견성이고, 타 단체는 모두 잘못된 견성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논리의 준거는 대부분 자신들의 경험이나, 자신들이 배운 경전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나는 발견하게 되었다.

진실로 남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비판이 되는 대상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경험을 한 후에 자신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 비판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느 강의를 들으러 가든지 그곳에는 꼭 필요한 배움이 있다. 단지, 강의에서 자신은 옳고 남은 틀리다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면 되고, 모든 것은 나의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기에 나의 경험을 근거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견성에 대한 견해가 너무 많아서 이렇게 정리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좌표를 잃어버리고, 정글을 횡단하는 것과 같이 길을 잃을 때가 많아서 이런 기준을 나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누구에게 배우러 갈 때는 이전의 나의 앎을 다 내려놓고, 그 주장을 하지 않고, 온전히 나를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우는 노력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에 있는 나의 아름아리가 올라와서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그전의 지식을 다 내려놓고 가르치는 사람이 제시하는 대로 바보스럽게 따라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한 번의 인연을 통해서 배우고 깨우치는 것이 많지 않은데, 달리 내 생각과 주관을 가지고 공부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이런 마음으로 동행진 수업을 들었다.

 

수업 내내 내가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겸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겸손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것이기에 늘 겸손하여지고자 노력했다. 그 외는 모두 수업 중에 일러주는 가르침 대로 살고자 했다.

 

동행진 수업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간 오랜 세월 배우고, 공부한 것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동시에 선명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들어내 주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 가르침은 본질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알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고, 그간에 배움을 다른 각도로 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진아를 견성하는 것을 초견성 혹은 참나의 발현이라고 한다. 이러한 진아에 대한 설명은 보통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 초월적인 것, 선명한 앎, 공적영지 와 같은 말들이다.

 

그러나, 수업에서 들려오는 스승님의 가르침은 남달랐다.

“진아를 깨운다는 것은 나의 양심의 중심에 나의 영이 투영되고, 그 중심에 하늘의 영이 투영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아란, 어둡고, 속되고, 죄된 나의 모습, 즉 에고의 모습을 버리고, 참되고, 올바른 것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더 선명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가르침이 매 수업마다 이루어졌고, 나는 그때마다 유레카 하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요즘 언어로는 이런 것을 사이다라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가르침은 그 내용만을 보아도 선명하게 견성을 하고, 견성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는 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도 목마르게 찾던 내용을 만나는 심정은 사막에서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또한, 몸에 대한 가르침도 그 깊이가 남 달랐다.

 

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고 나야 견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에 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는 참나를 찾는다면서, 에고라는 의식을 버리고, 몸이라는 절대적인 도구를 버리고 참나를 찾고 자 했던 것이다.

나의 일부를 부정하고, 바른 나를 찾는다는 것은 지나고 보니 우스운 일이었다. 나의 잘못된 것은 인정하지 않고, 내가 볼 때 좋은 면만 나라고 인정하는 의식으로 어떻게 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겠는가 !

지나고 보니, 참!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전까지는 그것을 몰랐다. 단지, 내 안에 신성이 있고, 거룩한 정신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 발현시키려고 하니, 반쪽인 나의 어둠이 나 여기 있다 하고 얼굴을 내미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을 것 같다.

 

테라무브라는 몸 공부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명상이자, 몸으로 하는 테라피였다. 비틀어지고, 결리고, 통증이 많았던 나의 몸은 빠르게 좋아졌다. 여기저기 아프고, 통증이 있고, 결리는데, 인내로 참고 있다가 자세가 좋지 않으면 죽비로 한 대 맞는 방식과 그 접근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몸에서 오는 장애를 바로잡고, 삼매에 들어가는 데 걸림이 되는 감정과 생각을 비우고, 바른길에서 벗어난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은 후, 잠시 동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1시간, 혹은 1시간 30분이 흘렀다.

 

나를 부정하고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정하고 나를 찾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가르침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놓치고 있었다.

 

많은 좋은 가르침이 있었지만, 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 글에 옮길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혹여 이 글을 읽으시고, 궁금한 분은 직접 수강해서 체험해 보시기 바란다. 나의 짧은 이해가 오히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나의 이야기, 나의 소소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일 것이다.

 

청림 스승님의 지도에 따라서 하나하나 하다 보니, 어느 날 깊은 삼매 속에서 진아를 체험하게 되었다.

 

진아를 대면하고, 그에 깊이 안주하고 보니 이전에 책에서 읽은 모든 내용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모든 분들의 가르침은 사실은 진아를 경험하러 가는 여러 가닥의 길 중의 하나였다. 모두가 옳고 모두가 그르다는 말은 진아의 체험을 말과 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경험은 그간 듣고 배웠던 모든 내용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나중에 스승님께 여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간의 많은 공부는 호기심이 많아서이고, 그 많은 공부가 한꺼번에 정리되어야 견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한 것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그 내용들이 다 정리되어야 견성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이 돌아왔다.

그래서, 사람마다 견성 현상이 각기 다르게 일어난다고 한다. 참나가 드러나는 것은 같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이 각자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기질이 각기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아를 만나고 보니, 생각이 끊어진 자리 등으로 찾아가는 길은 상단전을 이용해서 찾아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을 비워서 들어가는 것은 중단전을 이용해서 찾아 들어가는 것이고, 하심을 하거나, 단전 호흡을 하여서 들어가는 것은 하단전을 이용해서 찾아 들어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견성 오도의 견성이라는 것이 소위 말하는, 참나를 깨우는 것, 참나를 깨닫는 것이고, 오도라는 것은 도를 깨닫는 것인데, 이때 말하는 도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자리이며, 유교에서 말하는 천명이며, 선도에서 말하는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견성오도 라는 것은 참나를 깨닫고 그 안에 깃든 하늘의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그간 수십 년간 기독교인 생활을 하면서 찾아 헤매던 성령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성경을 열어 보았다. 나의 깨달음이 맞는지 알기 위해서 성령의 열매를 찾아보았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느낌이 곧바로 성령의 모든 열매를 한꺼번에 압축해 놓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찾던 하느님의 영, 성령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성령 집회를 많이 다니고, 금식 기도를 오래 했어도 찾지 못하던 것을 찾았다. 찾고 나서야 알았던 사실이 예수님의 심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기심을 버려야 했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했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어야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경서에 쓰여 있었지만, 참나를 만나고 보니, 모두가 다 진아 안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이 모든 진아의 통합이 곧 하나님의 진아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약 성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강연을 읽어 보았다. 그간 느낄 수 없었던 깊고 선한 울림이 내면에서 울려왔다.

이어서 도마 복음도 읽어 보았다. 거의 모든 내용이 그대로 이해되었다.

이로써 나는 정말로 내가 찾고자 평생을 노력했던 것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강의와 교육에서 주장하는 길은 다 맞는 것이었다. 단지, 그 길은 여러 가지 길 중에 한 가지 길이었고, 다른 길이 삿된 길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삿되다고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견성 이후에 하였기 때문에 삿된 것이었다.

만약, 비난과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이 사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상식의 도덕률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이한 행동은 진아를 만날 때 일어나는 초월성의 경험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아는 아무런 죄에 물들지 않고, 아무런 어지러운 감정과 생각에 물들지 않는 초월성을 가지고 있고, 지극히 청정한 성품을 잃지 않는 점이 이분들이 사회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견성을 다 이룬 것이라고 하지 않고, 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견성 당시의 초월적 느낌에만 깊이 몰입한다면, 상식에서 벗어난 말들이 더 멋지고, 정확한 표현으로 들린다는 사실을 경험을 하니 알게 되었다.

그간, 들었던 설명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은 견성 초기에 느껴지는 느낌 대로 이야기하니 듣는 사람을 놀리는 듯이 들리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이유는 좀 더 명확하고, 강렬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험을 한 후에는 이해할 수 있어도 경험 전에는 그런 말이 놀리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30년이 넘는 여정 속에서 이제야 초견성을 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견성을 경험하고, 그것도 젊은 분들이 견성을 많이 했다니,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 다녀보아도 이렇게 열심히 제자들의 견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스승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노고와 숭고한 발걸음에 깊은 경외감이 들었다.

이 나라에 이런 분이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희망이다. 어둡고, 암울하게만 느껴지던 미래가 희망차게 보인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코스를 통해서 참나를 찾고, 뜻깊은 날들을 열어가기 바라본다.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간 수고 많으신 선생님들과 스승님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12 0